과제를 하기 위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지 않았던 탓인지 도서 선정 목록에 있는 다른 책들은 나에게 너무 어려웠다. 그나마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쉬워 보였고, 요즘 연애, 사랑에 관심이 있어 ‘사랑이 무엇일까?’하는 궁금증에 이 책을 선택하였다. 처음 사랑의 기술을 읽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또한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의 머릿속에 남는 것은 마지막 사랑의 실천 부분뿐이었다.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실천 부분보다는 사랑의 이론,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중심을 두고 있다. 나는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여전히 완벽한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글을 써본다.
에리히 프롬은 서두에 제목 그대로 사랑의 기술에 대한 편리한 지침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그는 사랑은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것을 전달하고자 한다. 쉽지 않은 사랑이지만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 대한 현대인들의 태도를 지적한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의 모든 정력이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고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대인들이 이런 태도를 갖는 것에는 세 가지의 원인이 있다. 현대인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할 줄 아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또한 사랑을 능력으로 보지 않고 대상의 문제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시작했던 순간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상태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 대해 나는 현시대를 반영한다고 생각해 공감이 간다. 하지만 프롬이 이야기한 현대인들이 사랑을 시작한 순간의 경험과 사랑을 지속하고 있는 상태를 혼동한다는 것에는 다른 의견을 가진다. SNS상에서 사람들은 흔히 ‘썸’과 ‘연애’에 차이점 대해 이야기한다. ‘썸’과 ‘연애’는 단어 자체의 의미가 다르듯이 현대인들은 그 차이를 인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분리 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분리가 되어 세상에 나와 인간에게 내재적인 분리 불안 상태가 존재한다. 이런 분리 불안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방법을 여러 군데에서 찾는다. 도취적 행위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도취적’이라는 것은 진탕 마시고 노는 상태를 말한다. 도취적 합일은 강렬하고 난폭하고 몸과 마음에 동시에 일어난다. 또한 일시적이고 주기적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또 다른 사람들은 집단, 관습 등 일치를 통해 분리 상태를 벗어나려고 한다. 철저하고 냉정한 관례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 있어 완전히 불안을 없애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창조를 통해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프롬은 이런 방법들로는 분리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완전한 방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이 인간에게 있는 분리 불안에 대한 좋은 해법이라고 한다. 성숙한 사랑을 통해 분리 불안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성숙한 사랑을 하려면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롬은 ‘주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주는 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 희생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주는 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희생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의 강함, 부, 역량을 뽐내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긍심을 느끼고 자신감을 얻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기부와 같은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돕는 행위로부터 느끼는 기쁨도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아마 ‘그들 보다 나의 상태가 더 나아서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기쁨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프롬이 말하는 성숙한 사랑의 개념에서 눈에 띄었던 부분은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여기서 프롬은 한 대상에만 관심을 갖고 있고 남은 다른 대상에게는 관심이 없다면 이는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라고 한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이 ‘그럼 과연 이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 존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 사회적으로 성숙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인정받는 사람들까지도 실제로는 좋은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론 상 사랑이 어려워도 가능하다고 해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의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인간이 아닌 하나님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이런 나약한 현대인들에게 저자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은 기술이므로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훈련을 통해 숙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집중을 하여 훈련을 하는 것을 제시한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인내는 사랑의 기본이라고 한다. 사랑의 기술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 기술을 습득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관심을 갖고 실행해나간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또한 “나는 사랑하는 데에 자신이 있어!”라는 태도는 버리라고 한다. 자신감이 있는 것을 좋지만 자아도취의 상태에 접어들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발전하지도 못한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실천에서 프롬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한 신앙, 사랑의 능력 신뢰성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고 사랑이 결핍된 우리 사회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 환경은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게 조성되어있다. 특히 청년들은 학업, 취업, 경제적 부담 등의 문제로 자신을 사랑할 여유도 없을뿐더러 다른 사람,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슬픈 현실을 꼬집는 에리히 프롬의 글은 우리 모두가 하루빨리 사랑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랑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함을 전한다.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도 능력이며 배워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냥 단순한 감정 소비가 아님을 깨달았다. 사랑에 대해 조금은 무겁게 다가왔던 에리히 프롬의 말은 나의 앞으로의 삶에 영향이 분명 있을 것이다.